[번역] 예술은 게임이다
: 왜 중요한 건 (예술과의) 고투인가

Art Is a Game
C. Thi Nguyen on why the struggle (with art) is real

출처: blogs.lse.ac.uk/theforum/art-is-a-game/ (August 17th, 2020)

글쓴이: C. 티 응우옌 (C. Thi Nguyen)

옮긴이: 이동휘(leedonghwie@gmail.com)

역자 주:

C. 티 응우옌은 아래 쉽고 친절한 글에서 예술 감상을 게임, 그중에서도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에 빗댄다. 분투형 플레이란 말그대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분투하고(strive) 애쓰는(struggle) 것이 목적인 플레이를 말한다. C. 티 응우옌은 예술 감상에서 ‘옳은 판단을 내리는 일’이 특수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지적한다. 나도 응우옌의 주장에 동의하며, 예술감상뿐 아니라 예술이론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주장 혹은 더 급진적거나 비관적인 주장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struggle은 애쓰기, 애씀이라고 옮겼다.

역자 주 추가 (2022. 01):

C. 티 응우옌의 단행본 Games: Art as Agency(2020)가 2022년 하반기에 번역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 글의 번역을 많이 읽어주시는 것을 보고 번역제안을 넣어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아래 글이 그대로 실려있지는 않습니다.)
더하여, 단행본 번역 방식에 따라 아래 번역도 제목부터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고쳤습니다. 특히 'struggle'을 '애쓰다' 이외에 '고투'라는 한자어로도 옮겼습니다. 그러니까'striving'은 분투, 'struggle'은 고투가 됩니다. 좀 낡거나 특수하게 느껴지는 단어이긴 하지만, 단행본을 옮기며 struggle의 명사 용법에 깔끔하게 대응할 번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부득이하게 선택했습니다. 이를 포함하여 번역 제안이 있으시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페이지 하단에 '제안 보내기'란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이 번역문의 공개를 허락해주신 C. 티 응우옌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I thank professor C. Thi Nguyen for giving permission to post this translation.


우리는 예술을 이해하려 애쓴다. 우리는 세부를 파고든다. 최상의 해석을 찾는다. 서로와 논쟁하며 한 작품이 훌륭한 건지 허세스러운 건지를 두고 싸운다. '역대 최고의 리스트' 따위를 주고받고 순위를 두고 옥신각신한다. 그런데 우린 옳은 결론을 내는 일(getting things right)에 왜 이렇게까지 진심일까? 그냥 긴장 좀 풀고 즐거움만 찾으면 안 되나?

내 제안은 이러하다: 중요한 건 사실 고투(struggle)이다. 우리는 그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술을 공부하거나 그에 대해 길게 대화하는 게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우리는 예술을 이해하는 작업에 뛰어듦으로써 저런 즐거운 대화를 나누거나 저 놀라운 학문으로 이끌린다. 우리는 예술 감상의 관행을 절차상 즐거움에 맞추어왔다. 우리는 고투에서의 만족을 위해―신중한 관심, 해석, 평가에서의 쾌를 위해―예술에 참여한다. 이런 점에서 예술 감상은 게임과 같다. 게임에서는 목표와 제약이 게임 활동을 형성하고, 우리가 몰두하기를 희망하는 종류의 고투를 향해 게임 행위를 미세조정한다.

그리고 예술 감상을 게임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일은 예술감상에 관한 이상하게 뭔가 비잔틴스러운 '규칙들'을 이해시켜줄 것이다. 이는 예술 감상에서 독립적 판단의 가치라는 오래된 논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생각해보자. 두 개의 예술 감상 규범이 긴장을 이루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옳은 판단을 내리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판단이 예술작품의 세밀한 디테일에 들어맞기를 원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정신의 근본적 독립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우리는 반 고흐를 스스로 평가해야하고, 반 고흐의 기이한, 뒤틀린, 샘솟는 생명력을 스스로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카녜 웨스트의 새 앨범이 비극적 과욕인지, 오해 받는 걸작인지, 게으른 판촉물인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타인의 증언에만 기초하여 예술작품이 아름답거나 실패했다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술을 스스로 판단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요구는 완전히 상충하는 듯하다. 다른 지적 영역에서라면, 옳음에 대한 관심은 독립성 요구를 대개 압도한다. 뭔가 옳은 답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대개 전문가들에게 의지한다. 어떤 약을 복용할지에 관해 의사에게 의지하고, 내 차가 어떤 수리가 필요할지에 관해 기술자에게 의지한다. 과학 전문가들조차 수천 명의 다른 전문가들에게 의존해야한다. 그러므로 예술에 관해 진짜 옳은 답을 내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에게 의지해야하는 거 아닌가? 아니 지금, 베토벤이 나에게 온갖 풍부하고 놀라운 느낌과 반응을 전달하려고 하는데, 나는 베토벤이 뭘 하는 건지를 이해하는 데 틀림없이 필요해보이는 음악이론에 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만약 베토벤에 관해 옳은 판단을 내리고 싶다면, 클래식 전문가에게 의지해야하지 않나? 하지만 그런 의지(deference)는 예술감상이라는 활동 자체에 있어 핵심적인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같다. 전통적인 설명은 이것이다. 그런 의지는 미적 판단의 본질적 주관성을 놓친다. 만약 미적 판단들이 그저 우리 자신의 주관적 반응의 표현이라면, 미적 판단에 관해 남들에게 의지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에 관해 나는 아주 새로운 설명을 제안하고 싶다. 분명히 어떤 미적 판단들은 객관적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술 감상에서는 그런 옳은 답을 추구하는 이유가 다른 많은 객관적 분야들과 다를 수 있다. 과학에서 우리는 옳은 답을 내리는 데 관심이 있다. 하지만 예술 감상에서라면, 옳은 답을 내리는 활동에 참여하는 데, 보고 찾고 상상하고 해석하는 전 과정을 거치는 데 가장 관심이 있다. 이것이 전문가가 필요치 않은 이유이다. 옳은 판단은 예술 감상의 목표이지만 목적이 아니다. 예술감상의 가치는 옳은 판단을 내리려 시도하는 활동에 있지, 실제로 옳은 판단을 내렸다는 데 있지 않다.

게임의 유비는 여기서 아주 유용하다. 퍼즐 게임을 할 때 우리는 정답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퍼즐을 풀었던 전문가들에게 기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전문가들에게 기대지 않는 이유는 해답이 주관적이어서가 아니다. 많은 퍼즐들의 경우 단일한 객관적으로 옳은 해답이 정말로 존재한다. 그리고 만일 그 행위의 요점이 단순히 옳은 해답을 얻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써서 그 해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마 거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 그 방법일 테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인터넷을 뒤지지 않는다. 왜냐면 이 활동의 요점이 스스로 시도하고 찾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더 잘 이해하려면 목표(goals)와 목적(purposes)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어떤 활동의 지엽적 목표(local goal)는 당신이 그 활동이 지속되는 동안 겨냥하고 추구하는 무엇이다. 어떤 활동의 목적은 애초에 그 활동을 하게 된 당신의 이유이다. 어떤 플레이어들에게 목표와 목적은 동일하거나 혹은 가깝다. 가령 올림픽 운동선수들은 이기려고 노력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이기고 싶기 때문이다; 혹은 프로 포커 플레이어는 승리했을 때 따라오는 돈을 원하므로 이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다른 많은 플레이어들에게 목표와 목적은 첨예하게 다르다. 많은 경우, 암벽등반을 하는 나의 목적은 긴장을 풀고 내 머릿속 끝없이 조잘대는 목소리를 멈추기 위함이다. 하지만 긴장 이완을 위해서는 암벽의 꼭대기에 오르겠다는 지엽적 목적에 내 자신을 던져야 한다. 암벽등반에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지엽적 헌신이 필요하다―그리고 그 몰두야말로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도식에서, 나는 내가 꼭대기에 갈 수 있을지를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온종일 실패를 거듭했지만 정신적, 영적으로 상쾌해져서 귀가한다면, 하루를 잘 보낸 셈이다.

그러니까 게임 플레이와 연관되는 두 개의 아주 다른 동기 구조들이 있는 셈이다. 첫째, '성취형 플레이'(achievement play) 즉 승리 자체의 가치(혹은 가령 돈과 같이 승리에 따라오는 무엇)를 위하여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둘째,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 즉 고투의 가치(혹은 신체단련fitness 혹은 긴장이완 등 고투에 따라오는 무엇)를 위하여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분투형 플레이어가 이 바람직한 고투를 얻기 위해서는 정말로 이기려고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기는 것이 초점은 아니다. 초점은 플레이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분투형 플레이가 실제로 가능한 동기라는 것(a real motivational possibility)을 의심한다면, 이른바 '바보 게임'(stupid games)의 존재를 생각해보자. 바보 게임이란 첫째로는 재미가 실패로부터 비롯되고, 둘째로는 재미를 얻으려면 이기고자 노력해야하는 게임이다. '트위스터', 아이들이 하는 '전화 게임', 그리고 대부분의 술게임들이 그 사례이다. '트위스터'의 재미는 넘어질 때 발생한다. 하지만 일부러 넘어지면 재미가 없다. 넘어지는 건 그것이 진짜 실패일 경우에만 재미있고, 진심으로 이기고자 노력할 경우에만 진짜 실패가 된다.

바보 게임은 우리가 가진 분투형 플레이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게임에서 우리는 성공을 추구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성공에 가치를 두지는 않는다. 우리의 목적은 배꼽 빠질듯한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다. 더 넓게 말해,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게임에서 목표와 목적 사이의 불일치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친구들과 보드게임 잔치를 벌인다고 해보자. 많은 게임들에 있어서 재미는 오직 플레이어들이 진짜로 고투에 몰입할 때에만 생긴다. 재미를 느끼려면 나는 진심으로 이기고자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게임에서 졌다고 해서, 나는 그날 저녁을 낭비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겼는지 졌는지가 아니라, 그 시도로부터 재미를 느꼈느냐이다. 진정 눈치없는 친구(poor sport)만이 이와 반대로 생각할 것이다.

분투형 플레이는 동기 역전(motivational inversion)을 수반한다. 일상 세계에서는 목표를 위해서 수단을 취한다. 하지만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수단을 위해서 목표를 취한다. 목표가 우리에게 강제하게 될 고투를 위해서 그 목표를 고르는 셈이다.

나의 제안은, 예술 감상이 또 다른 종류의 분투형 활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에 관한 옳은 판단을 내리기를 목표로 하지만,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은 사실 핵심을 벗어난다. 만약 옳음이 우리의 진짜 목적이었다면, 우리는 옳은 답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전문가에게 의지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러한 의지는 핵심을 놓치는 셈이다. 설령 온갖 실수를 저지르게 되더라도, 자기 스스로 예술에 참여하기를 시도하는 것이 훨씬 낫다. 예술 감상의 가치는 스스로 예술을 뜯어보는 과정에 참여하는 데 있다. 가이드북에 코를 박고 전문가들이 제시한 의견들만을 주워섬기는 사람은, 바보 같은 파티 게임에서 졌다고 기분 상해 하는 눈치없는 친구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다. 그들은 즐거운 분투를 생산하도록 고안된 활동에 성취형 사고방식을 들이댄다. 가이드북 중독자는 예술 감상이 성취지향 활동이라고, 즉 모든 옳은 판단을 내리면 예술에서 이기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예술 감상의 '참여 설명'(engagement account)이라고 불러보자. 즉 예술 감상의 최우선 가치는 옳은 판단을 산출하는 과정에 있지, 옳은 판단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참여 설명은 전문가에게 의지하는 일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예술 전문가에게 의지하기는 마치 퍼즐 게임을 하면서 온라인으로 답을 찾아보는 것과 같다. 이는 지엽적 목표를 더 큰 목적과 혼동하여 그 활동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여기서 초점은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참여 설명은 남들을 신뢰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컨대, 이 설명은 예술 교육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참여 설명은 예술에 있어 남을 신뢰하고 남에게서 배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런 신뢰가 출발점이며 우리 자신의 여정을 위한 도움이어야지 도착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예술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여 우리가 놓쳤던 디테일에 주목하게끔 허락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지침을 이용하여 자기 자신의 더욱 활발한 참여를 증진한다면 말이다. 참여 설명은 당신을 더 많은 참여로 이끌어주는 미적 신뢰(aesthetic trust)의 형식들을 옹호하되, 개인적 참여를 차단시키는 종류의 종속(subservience)은 거부한다.

그러면 애초에 옳음(correctness)은 왜 겨냥하는 것인가? 그냥 순수한 상상의 자유 속에서 감각적으로 흥청대면 안 되나? 그냥 믿고픈 걸 믿고 무시하고픈 디테일은 무시하면 안 되나? 게임과의 유비가 답변을 하나 제시할 수 있다. 게임에서 우리는 특정 목표와 특정 규칙을 받아들인다. 왜냐면 그 목표들은 우리를 매우 구체적인 형식의 활동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암벽등반을 할 때 우리는 인위적 목표를 받아들인다―절벽 끝까지 힘들게 올라갈 것. 또 우리는 인위적 제약을 받아들인다―헬리콥터도 안되고, 도르래도 안되며, 줄이나 기어를 당기지도 말고, 암벽 자체의 자연적 특성에 따라 오직 손과 발을 이용하여 전진할 것. 그러한 제약은 암벽등반-알못들(rock climbing novices)에게 흔히 기이하게 비친다. 그들은 묻는다. ‘왜 로프를 당기면 안돼? 그게 훨씬 쉽잖아!’ 대답하자면, 만약 로프를 당기는 것이 허용되면 대부분의 암벽등반이 다 같은 지루한 생고생―몇 가지 단순한 동작으로 끝없이 줄 당겨 올라가기―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암벽의 자연적 특성만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 암벽의 다양한 특성에 집중해야 한다. 암벽의 미묘한 무늬와 홈을 찾고, 계속 변화하는 일련의 디테일로부터 참신한 해답을 만들어내야 한다. 암벽등반의 규칙들은 신중한 관심과 반응적인 창의성으로 이루어진 끝없이 다양한, 어려운, 계속 갱신되는 활동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 과정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런 이상한 제약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예술 감상이 이와 유사하게 만들어진 관행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특수한 형태의 신중하고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관심 즉, 새로운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이 자기갱신하는 관심을 스스로 조형하기 위하여, 옳음이라는 목표(goal)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스스로 생각해야한다는 제약을 채택한다. 그리고 이 특이하고도 매력적이게 세밀한 형태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증진하기 위하여 그러한 감상의 표적, 즉 예술 대상 자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참여 설명은 어째서 우리가 종종 미묘하고 복잡한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지도 설명한다. 참여의 과정은 뻔하고 명시적인 예술에 대해서는 너무 빨리 지나간다. 하지만 미묘하고 모호한 예술은 참여의 길고 만족스럽게 관계적인(involved) 절차들을 유지한다. 우리는 옳음을 추구하지만 이는 옳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 몰입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가지 가능한 결론에 머물게끔 유혹하면서도 언제나 새롭고 신선한 탐구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활동을 창조하고자 시도한다. 우리는 우리 삶이 예술작품으로써 결말이 열려 있는, 끝나지 않는 대화가 되기를 바라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논변으로써 끝나버릴 무언가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 과학과 도덕 사이의,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과 예술 감상 사이의 큰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만약 의학의 중요한 미스터리를 풀거나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할 해답을 찾아낸다면, 우리는 좀 안심할 것이다. 누군가 윤리학의 모든 딜레마를 푸는 책을 썼다면, 나도 읽고 남들에게도 읽으라고 권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모든 미스터리와 모호성을 모조리 설명해내는 매뉴얼을 썼다면, 나는 좀 슬퍼지지 않을까 싶다. 나는 참으로 놀라운 무언가가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그 매뉴얼을 별로 읽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다.

(끝)


번역, 내용, 페이지에 관해 제안해주실 바가 있으면 감사히 듣겠습니다.